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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산 저 산 온 산이 연두색 물감으로 툭툭 찍어 놓은 듯 하다. 마치 밥 로스가 그린 산수화 같다. 온 산을 하얗고 붉게 물들였던 봄꽃은 눈 깜박 한 번 하니 어디론가 사라져 버렸다. 아무것도 없던 마른 가지에서 꽃이 피었다. 그리고 꽃은 사라지고 아무것도 없는 그 자리에 파란 잎이 돋아난다. 만물은 무(無)에서 왔다가 무(無)로 사라진다.

 

삶은 탄생과 죽음의 수레바퀴라고 한다. 태어나고, 젊은이가 되고, 욕망에 가득 차고, 그러다가 힘이 빠지면 늙고, 병들고, 절망하고 지쳐서 죽는다. 그런 다음 다시 태어나고......, 이런 일이 되풀이 된다. 이런 되풀이 되는 바퀴에 우리는 메달려 있다. 새로운 일은 아무것도 일어나지 않는다. 매일 매일이 고통스럽다. 아무 곳에도 도달하지 못한다. 새로운 일이 일어나고, 고통스러운 매일 매일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는 이 바퀴에서 벗어나야 한다. 

 

탄생과 죽음의 이 수레바퀴에서 해방되는 것이 자유, 해탈, 열반이다. 같은 궤도를 반복해서 구르는 바퀴에서 탈출해야만 영원한 자유를 얻을 수 있다. 이 영원히 자유로운 삶을 사는 길은 탄생과 죽음 사이의 틈에 존재하는 것이다. 탄생은 과거고 죽음은 미래다. 과거와 미래의 틈이 바로 현재, 즉 지금 여기다. 과거와 미래로 가지 않고 현재에 존재하는 삶이 유일한 삶이다. 즉 지금이 유일한 시간이고, 여기가 유일한 공간이다. 과거와 미래는 실재하지 않는다. 오직 실재하는 것은 현재, 즉 지금 여기 밖에 없다. 실재하지 않는 시간과 공간에 힘을 빼앗기는 만큼 어리석은 짓은 없다. 그러나 오늘날 수많은 사람들이 이와 같은 어리석음에 빠져 삶을 낭비하고 있다.

 

우리는 수많은 시간을 통해 온갖 모습으로 탄생과 죽음을 거듭하고 있다고 한다. 불교에서는 이를 환생이라고 한다. 어떤 때는 나무로 태어났고, 어떤 때는 소로 태어났고, 어떤 때는 물고기로 태어나는 등 새로운 모습으로 계속 환생하고 있다는 것이다. 붓다는 '한때 나는 코기리였고, 한때는 물고기였고, 한때는 나무였다.' 라는 말을 했다고 전해진다. 

 

붓다는 자유(해탈, 열반, 깨달음)를 얻기 위해 육년 이라는 세월을 노력했다고 한다. 그러나 그는 깨닫지 못했다. 모든 것을 포기하고 그만 두려고 하는 순간 깨달음이 일어났다. 깨달음을 얻기 위한 욕망을 내려놓는 순간, 깨닫기 위한 모든 노력을 포기하는 순간 깨달음을 발견했다. 마음을 내려 놓았을 때 깨달음이 찾아왔다. 마음은 항상 과거와 미래에만 존재할 수 있다. 과거와 미래에서 탈출하는 순간 깨달음이 온 것이다. 태어나고, 젊은이가 되고, 온갖 욕망에 허덕이고, 그러다가 힘이 빠지면 늙고, 병들고, 절망하고 지쳐서 죽고, 다시 다른 생명체로 태어나서 살다가 죽고..... 수도 없이 반복되는 이 고통으로부터 벗어나는 길은 오직 지금 여기라는 간단한 진리를 발견한 것이다.

 

붓다, 예수, 마호메드, 마하비라, 크리슈나, 노자, 장자, 헤라클레이토스, 피타고라스 등, 앞서간 선각자들이 전하는 메시지는 똑 같다. 그들의 공통된 메시지는 바로 '지금 여기' 라는 점이다. 

 

그러나 지금 여기를 놓치지 않고 살기가 쉽지 않다. 순간 순간 마음이 끼어들기 때문이다. 마음이 자꾸만 훼방을 놓는다. 놓치고 놓친다. 하루 종일 이 놓침이 전부일 정도로 지금 여기에 존재하는 것이 어렵다. 그러나 영원한 자유를 얻어야겠다는 간절한 열망과 끈기로 정진해야 한다. 그렇게 하다보면 차츰 차츰 지금 여기에 머무는 시간이 길어진다. 어느 날 하루종일 아무도 방해하지 않는 날이 찾아온다. 이 날이 오면 자기도 모르게 입가엔 엷은 미소가 번진다. 마치 깨달음을 얻은 붓다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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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는 청명절이었다. 하루종일 비가 내렸다. 오랜만에 산천초목을 촉촉히 적시는 비였다. 오늘은 한식절이다. 불의 사용을 금하고 찬 음식을 먹는 날이라고 한다.

 

요즘 처럼 산불이 많이 나는 것을 보면 너무 안타깝다. 아침 산책을 하다보면 군데 군데서 연기가 피어 오른다. 농사일을 하는 사람들이 아무 의식없이 저지르는 행위다. 논밭에서 나온 각종 작물의 찌꺼기를 태우고 있다. 왜 태워야 하는지도 모르고 습관화되어 있다. 한곳에 모아 두면 자연이 알아서 처리한다. 거름이 되어 땅을 살린다. 그러나 요즘 농사꾼들은 벌레들을 없애기 위해 태운다고 한다. 그러면서 일년 내내 농약은 왜 그리도 많이 뿌려되는 지 이해가 안 된다. 앞뒤가 맞지 않는 말이다. 이런 사람들을 농부라고 할 수 있을까? 농부가 아니라 자연 파괴자라고 해야 옳을 것 같다. 참된 농부는 자연과 조화를 이루어 사는 사람이다. 자연을 무서워하고 존경한다. 자연의 흐름에 복종한다. 풀 한 포기, 벌레 한 마리의 생명까지도 소중히 여길 줄 아는 사람이 진짜 농부다.

 

현재를 살아가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미쳤다는 느낌이 든다. 순수함과 천진무구함이 사라졌다. 수정 처럼 맑고 깨끗한 눈망울이 보이지 않는다. 느긋한 걸음걸이가 없어졌다. 존재 전체가 속됨으로 가득 찼다. 물질욕, 권력욕, 성욕, 명예욕의 썩은 냄새가 진동한다. 가는 곳 마다, 만나는 사람들 마다 이런 욕망에 걸려들지 않은 사람이 없다. 

 

정치하는 사람들은 국민을 노예로 만든다. 겉으로는 국민을 위한다고 하지만 절대 그렇지 않다. 자신의 권력을 유지하기 위해 온갖 거짓말을 한다. 인간의 역사가 생긴 이래로 수많은 정치가들이 있었지만 단 한 번도 국민들에게 자유와 행복을 가져다 준 적이 없다. 오히려 교육이라는 그럴싸한 사기를 통해 국민들을 세뇌화시켜 노예로 만들었다. 자신이 세뇌화 되는지도 모를 정도로 그 역사가 너무 오래 되었다. 지금 현재도 계속되고 있다. 정치 집단에 따라 국민의 삶의 질이 조금은 차이가 날 수는 있지만 국민의 삶에 자유와 행복은 가져다 주지 못하고 있다. 

 

우리는 이런 세뇌화로부터 벗어나야 한다. 부모의 말, 선생의 말, 성직자의 말, 사회의 말이 무엇인지 이해해야 한다. 그리고 그들의 말이 바로 세뇌화라는 것을 깨달아야 한다. 그들 또한 그 윗 세대로부터 세뇌화 되었다. 그러므로 그들을 증오해서는 안 된다. 가엽게 여겨야 한다. 그리고 우리는 자식 세대에게 똑같은 잘못을 저지르지 말아야 한다. 

 

우리는 자식 세대들에게 무한한 자유를 주어야 한다. 처음 이 땅에 올 때 처럼 순수함과 천진무구함을 잃지 않도록 도와 주어야 한다. 그것은 바로 우리가 온 곳, 바로 우주계(존재계, 자연계)를 알게 하는 일이다. 자연의 소리를 들을 수 있도록 해야 한다. 땅을 밟고 흙을 만질 수 있도록 해야 한다. 밤하늘에 빛나는 별을 마주보게 해야 한다. 나무와 숲을 가까이 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 계절 마다 피고 지는 온갖 꽃들을 보고 자라도록 해야 한다. 샘물 소리, 계곡물 소리, 강물 소리, 파도 소리, 를 들을 수 있도록 해야 한다. 온갖 새 소리와 동물들의 울음 소리를 들을 수 있도록 해야 한다. 자연의 일부라는 것을 느끼도록 해야 한다. 그래서 우주계(존재계, 자연계)를 존경하고 두려워 할 줄 알게 해야 한다. 우주계(존재계, 자연계)에 복종할 줄 알게 해야 한다. 

 

우리가 믿고 따라야 하는 말은 정치꾼의 말도, 부모의 말도, 선생의 말도, 성직자의 말도 아닌 바로 우주계(존재계, 자연계)의 말이다. 그들의 말은 소란스럽기만 할 뿐 삶에 있어서 그 어떤 가치도 없다. 그러나 우주계(존재계, 자연계)는 말 없는 침묵이지만 삶의 지혜를 가져다 준다. 그들의 말은 혼란을 가져다 주지만 우주계(존재계, 자연계)의 침묵은 평화를 가져다 준다. 그들의 말은 구속으로 옥죄지만 우주계(존재계, 자연계)의 침묵은 무한한 자유를 가져다 준다.

 

다음 세대에게는 우리가 세뇌 되었던 것을 똑같이 물려줘서는 안 된다. 그 아이가 태어날 당시의 그 모습, 그 존재 상태 그대로 유지 하도록 도와야 한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부모가 깨어 있어야 한다. 그 깨어 있음이란 지금까지의 세뇌화를 이해하고 없애는 일이다. 

 

내가 가장 하고 싶은 일을 하면서 즐겁고 행복한 일이 무엇일까?

부모와 선생과 성직자와 사회의 세뇌화가 없었다면 지금 나는 무엇을 하고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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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울 내내 앙상했던 가지에 연두빛 여린 잎이 피어난다. 그 모습이 꼭 뭉게구름 같다. 이산 저산 온 산이 연두색 물감을 떨어뜨려 놓은 듯 하다. 내일이면 청명이고 보름이며 모레는 한식이다. 

 

[농사력으로는 청명 무렵에 논밭의 흙을 고르는 가래질을 시작하는데, 이것은 특히 논농사의 준비 작업이 된다. 청명이 되면 비로소 봄밭갈이를 한다. 청명은 농사력의 기준이 되는 24절기의 하나로 날씨와 관련된 속신이 많다. 청명이나 한식에 날씨가 좋으면 그 해 농사가 잘 되고 좋지 않으면 농사가 잘 되지 않는다고 점친다. 바닷가에서는 청명과 한식에 날씨가 좋으면 어종이 많아져서 어획량이 증가한다고 하여 날씨가 좋기를 기대한다. 반면에 이날 바람이 불면 좋지 않다고 생각한다. 또 파도가 세게 치면 물고기가 흔하고, 날씨가 맑아도 물밑에서 파도가 치는 경우가 많다. 이에 비해 경남 사천에서는 청명날의 날씨가 좀 어두워야 그 해 농작물(農作物)에 풍년(豊年)이 들고, 너무 맑으면 농사(農事)에 시원치 않은 것으로 생각하기도 한다.

어떤 지역에서는 청명에 나무를 심는데, 특히 ‘내 나무’라 하여 아이가 혼인할 때 농을 만들어줄 재목감으로 나무를 심었다. 이날 성묘(省墓)를 가기도 한다.

제주도에서는 청명이나 한식은 지상에 있는 신들이 하늘로 올라간 날이어서 특별히 택일(擇日)을 하지 않고도 산소를 돌보거나 이장(移葬)을 해도 좋다고 믿는다. 또 이날은 손이 없기 때문에 묘자리 고치기, 비석 세우기, 집 고치기를 비롯해 아무 일이나 해도 좋다고 한다.]

 

어제 아침 산책 후에는 갑자기 몸이 안 좋았다. 일 년 동안은 큰 아픔이 없었다. 그래서 몸이 거의 완치되었다고 생각했다. 그것이 문제였다. 다 낳았다고 기쁜 나머지 너무 많이 먹었다. 인공적으로 만들어진 음식을 많이 섭취했고, 귀찮다는 이유로 전자파의 힘을 빌린 것이 큰 잘못이었다. 자연과 멀어진 행위를 한 것이다. 먹고 마시는 것에 잠들어 있었던 것이다. 오늘 번쩍 깨어났다. 자연님에게 잘못을 빌었다. 

 

우리는 세상을 너무나 인공적으로 만들어 버렸다. 자연님의 품에 안겨 있는 것이 아니라 인간이 만든 옷에 둘러싸여 있다. 나무와 숲과 함께 사는 것이 아니라 거대하고 추한 시멘트 구조물에서 살아간다. 흙이 아니라 콜타르나 시멘트로 덮힌 길을 걷는다. 자연이 주는 맛과 향과 색이 아니라 석유에서 변형시킨 것들에 길들어졌다. 오늘날 인간은 인공적인 세상을 만듦으로써 스스로 자연과 단절되었다. 뿌리를 잃은 것이다. 이것이 우리가 처한 불행의 기본 원인 중 하나다. 다시 따에 뿌리를 내려야 한다.

 

여기에 인류의 미래가 달려 있다. 우리는 자연을 다시 불러 들여야 한다. 만약 아무도 없는 산골에 산다면 날씨가 허락할 때마다 옷을 다 벗고 지낼 필요가 있다. 알몸으로 자연에 안기면 새로운 전율을 느낄 수 있다. 뭔가 모를 새로운 힘이 용솟음 친다. 자주 나무와 숲이 있는 곳을 찾고, 맨땅을 걷고 자연이 키운 식재료들을 먹어야 한다. 

 

강가에 앉아 있는 것과 인공적으로 만들어진 수영장에 앉아 있는 것은 전혀 다른 느낌을 준다. 수영장에는 생명력이 없다. 수영장 물은 죽어 있다. 흐름이 없기 때문이다. 산이나 강, 나무와 숲이 있는 곳에서는 생명력이 있고 즐거움이 있다. 편리 하다고 전자레인지로 데운 밥과 직접 불을 지펴 지은 밥은 전혀 다른 맛과 행복을 가져다 준다. 전자레인지로 데우는 밥은 죽은 밥이다. 고온에서 고압을 가해 만든 밥이다. 원래 쌀이 가진 영양소들을 다 파괴시켰다. 이렇게 만든 밥은 오래 동안 썩지 않을 뿐이다. 전자레인지에서 뿜어져 나오는 전자파는 고스란히 밥에 스며든다. 플라스틱 용기와 비닐 두껑에서 녹아 나오는 화학물질 또한 밥에 스며든다. 

 

인공적으로 만들어진 식품들, 이름하여 가공식품이라고 하는 식품들은 모두 죽은 식품이다. 식품이 가진 본래의 기능은 무시한 채 오로지 모양과 색과 맛을 내고 오래 동안 썩지 않게 하기 위해 온갖 사기를 다 친다. 앞에서 언급한 것처럼 고온 고압으로 처리를 하고, 인공적(화학 합성법)으로 만들어진 맛과 향과 색은 물론 방부제까지 넣는다. 식품 뿐만이 아니다. 의약품도 마찬가지다. 인간의 모든 영역에 골고루 뿌리를 내렸다. 

 

오늘날 수많은 육체적 질병과 의식적 질환의 원인이 바로 여기에 있다. 아무리 뛰어난 과학이나 의술이 발달한다 해도 늘어나는 질병을 잡을 수 없을 것이다. 우리 인간은 다시 자연을 불러 들여야 한다. 자연의 위대함과 경이로움을 이해해야 한다. 시간을 내서라도 자연과 가까이 해야 한다. 도저히 믿을 수 없는 놀라운 힘을 직접 경험해야 한다. 그렇지 않고서는 자연을 이해할 수 없기 때문이다. 

 

어제 밭두렁에서 캐 온 쑥을 솥에 넣고 천천히 덖는다. 그 향기가 온 몸을 편안하고 평화롭게 한다. 덖을 때 느껴지는 그 전율은 온 몸을 따뜻하게 한다. 다 덖어진 차를 그늘에서 말린다. 지금 여기, 이 순간 쑥 차 한 잔을 마신다. 자연님의 한 없는 자비를 느끼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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