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순간 노랗게 핀 산수유꽃이 눈에 들어온다. 아뿔사! 또 놓쳤구나! 눈을 부럽뜨고 지켜보지 않으면 재빠르게 쳐들어오는 놈, 바로 생각이라는 놈이다. 단 한 순간이라도 틈을 주면 본성(참나, 의식)을 마구 어지럽히고 만다. 한 두가지 생각만이 아니다. 온갖 생각들이 온 본성(참나, 의식)을 차지한다. 과거와 미래로 오고 가기를 반복한다. 앉아 있을 때나, 길을 걸을 때나, 밥을 먹을 때나, 잠을 잘 때나 단 한 순간 조차도 현재 이 순간에 집중한다는 것이 쉽지 않다. 바로 눈 앞에 산수유꽃은 이미 수를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피었건만 그동안 뭘 하느라 보지 못했는지?
하루 스물 네시간 동안 온전히 현재(지금 여기)에 집중하는 시간이 얼마나 될까? 단 일분도 안될 때가 대부분이다. 놓치는 순간이 너무 많다. 지금 여기 집중해야지 하는 순간에도 이미 마음은 저 멀리 가 있다. 노랗게 핀 산수유꽃을 보면서도 마음은 다른데 가 있다. 그 아름답고 신비한 순간을 느끼지도 즐기지도 못하고 말이다. 산수유꽃이라는 이름과 노랗다는 것 정도만 아는 것으로 끝이다. 순간 순간에 사는 사람이라면 그저 그 꽃에 몰입되어 한 몸이 될 것이다. 이름과 색깔은 아무 상관없다. 존재와 존재와의 순수한 만남이 전부다.
현대 사회는 상대방의 말을 들을 줄 모르고 자기 할 말만 하는 사람들이 많다. 듣지는 않고 자기 하고픈 말만 한다. 이런 사람들과는 대화가 되지 않는다. 말이 오고가고 이해할 수 있어야 대화라 할 수 있는데 오는 말에는 귀를 닫아 버리고 내 뱉기만 하니 무슨 대화가 될 수 있겠는가. 들을 줄 모른다. 듣는다는 것은 단순히 듣는 것이 아니라 이해하는 것이다. 그 말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이해하는 것이 들을 줄 아는 것이다.
서로 자기 말만 하는 것이 문제다. 그래서 다툼이 생기는 것이다. 정치하는 사람들이 매일 싸우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우주계(존재계, 자연계)는 말이 없다. 침묵 그 자체다. 우주계(존재계, 자연계)를 아는 사람은 말이 없다. 진리는 말로 표현할 수 없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거짓 삶을 사는 사람들만 말이 많다. 자신의 거짓된 모습을 감춰야 하기 때문이다. 자신의 추하고 거짓된 모습을 다 덜어내야 한다. 지금까지 교육받고 훈련받은 삶으로부터 벗어나야 한다. 지금까지 자신이라고 믿었던 '나' 가 참 나인지 알아야 한다. 믿고 있는 그 '나' 가 거짓된 나는 아닌지 잘 살펴 보아야 한다.
참나(본성, 의식)을 아는 순간 침묵이 찾아온다. 참나(본성, 의식)는 우주계(존재계, 자연계)이기 때문이다. 참나(본성, 의식)는 우주계(존재계, 자연계)의 일부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침묵할 수 밖에 없다. 말이 아니라 느낌이 있을 뿐이다. 우주계(존재계, 자연계)와의 교감을 통해 느낌으로 알 뿐이다. 침묵하고 복종하고 존경하고 두려워할 줄 아는 것이 가장 참다운 삶이라는 것을 안다.
우주계(존재계, 자연계)는 늘 우리에게 알려주고 있다. 계속 부르고 있다. 그러나 우리는 거짓된 모습에 갇혀 귀가 멀어 버렸다. 부모, 사회, 종교로부터 만들어진 거짓된 모습으로부터 벗어나야 들을 수 있다. 지금까지 긁어 모은 모든 지식을 벗어 던져야 한다. 거짓된 삶으로부터 탈출해야 한다. 아무것도 없는 순수한 상태가 되어야 한다. 우주계는 무, 공(無, 空)의 순수 그 자체다. 우주계(존재계, 쟈연계)가 부르는 소리를 듣기 위해서는 순수해져야 한다. 아무것도 없는 빈 상태가 되지 않고서는 절대로 진리와 마주칠 수 없다.
순수해져야 한다. 순수해진다는 것은 텅 빈 상태가 되는 것이다. 생각과 마음이 없는 상태가 되어야 한다. 지식이 툭 튀어나오지 않는 상태가 되어야 한다. 갓 태어난 아이가 되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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